에티오피아에서 아랍으로
커피는 에티오피아의 고지대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무역로와 문화 교류를 통해 세계 다른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커피가 다른 지역에 도달하는 정확한 경로는 명확하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커피의 확산이 무역, 종교 및 식민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커피의 원산지라 여겨지는 에티오피아에서 최초로 홍해를 건너 남부 아라비아로 전달된 과정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가 525년 남부 아라비아를 침공한 것을 근거로 이때, 아라비아로 커피가 처음 전파되었으며 이후 메카, 카이 등지로 퍼져 나갔을 것이라 추측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시 흑인 노예들이 비상식량으로 커피를 지니고 아라비아로 건너가 아라비아에서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1000년 경에 아프리카를 침략했던 노예상에 의해 이미 커피가 아라비아에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에티오피아 밖에서 커피를 소비한 최초의 기록 사례 중 하나는 15세기 예멘에서였습니다. 커피 재배는 예멘에서 시작되었고 커피 하우스는 모카와 아덴과 같은 도시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커피는 터키, 이집트, 아라비아 반도를 포함한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16세기에 유럽 상인들이 커피 거래를 시작했고, 베니스, 암스테르담, 파리와 같은 유럽 도시에서 커피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들에 커피하우스가 생기기 시작했고 커피는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즐기는 사회적 기호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와 같은 식민 세력은 식민지, 특히 남미와 카리브해에 커피 농장을 설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플랜테이션은 노예 노동에 의존했고 커피는 유럽과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되는 주요 환금 작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커피는 브라질,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베트남을 비롯한 주요 커피 생산국과 함께 세계 여러 곳에서 재배되고 소비됩니다.
커피유출금지령
이란을 거쳐 터키로 전달된 커피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널리 음용되지만 외부로의 유출은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 커피를 최초로 경작한 아라비아 사람들은 주요 수입원인 커피나무의 유출을 막기 위하여 커피 열매를 삶거나 불로 건조하지 않으면 그 지방에서 가져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외국인들에게는 커피 경작지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매년 수백만의 순례자가 메카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커피 종자의 유출을 막기는 불가능하였고 1600년 경 인도에서 온 순례자 바바 부단에 의해 밀반출된 7개의 커피 종자는 결국엔 네덜란드 상인의 손에 넘겨져 네덜란드의 온실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마라바르 지방에서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1699년에는 다시 인도네시아 자바의 바타비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은 유럽에 커피를 공급하는 주요 커피 생산지가 되었고 암스테르담은 이러한 커피가 집결하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커피하우스와 유럽의 커피문화
세계 최초의 커피숍은 1475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문을 연 Kiva Han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Kiva Han은 학자, 지식인, 예술가들이 모여 정치, 문학 및 기타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커피하우스는 오스만 제국 전역과 그 너머에서 인기 있는 모임 장소가 되었고 유럽과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커피를 재배하고 소비해온 예멘과 이집트의 도시를 포함하여 세계 최초의 커피숍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여러 도시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iva Han은 일반적으로 가장 초기에 기록된 커피숍이자 커피 문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십자군 원정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한 커피는 처음에는 이교도의 음료라 하여 배척을 받지만 1615년부터는 베니스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본격적으로 커피가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다. 1683년에는 베니스에 오늘날 카페의 전신인 커피하우스가 유럽 최초로 문을 열었고 17세기 말엽에는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도처에도 커피하우스가 생겨났습니다. 1650년 야콥이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옥스포드에 커피하우스를 개장했습니다. 곧 이러한 장소는 수백 개로 불어났고 페니유니버시티(penny universities)로 불려졌는데 그 이유는 입장할 때 페니를 지불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커피하우스는 종종 부유한 단골 고객들의 열띤 토론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어떤 곳은 오늘날 금융기관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음모와 모함의 장소로 활용이 되었던 것이죠. 이에 조심성 많은 찰스2세 국왕은 1676년에 커피하우스를 모두 폐쇄시키려 하였으나 시민들의 항의가 너무 거세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더욱 융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과 커피의 인기
1668년 영국으로부터 미국 버지니아 지방에 커피가 전파된 후 곧바로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톤 등에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당시 차의 인기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1773년에 발생한 한 사건은 그 판도를 완전히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라고 불리우는 이 사건은 영국에서 수입되는 차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타운젠트법안이 통과되면서 보스턴 주민들이 영국 상선에 실린 차를 모두 바다에 내던짐으로서 발생했는데 이후 커피의 인기가 차의 인기를 앞질렀습니다. 또한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커피나무를 선물함으로써 프랑스에 처음으로 커피가 전파되었다고 전해졌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 커피가 전파되는데 그 사연이 매우 흥미롭다. 1720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 섬에서 해군 장교로 근무를 하던 클리외는 휴가를 파리에서 보내는 동안 루이 14세의 정원에서 커피묘목을 얻게 되었습니다. 섬으로 돌아가는 항해 중 소금기 많은 바닷물과 추위로부터 커피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유리상자에 넣어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극진히 보살피던 그는 항해 중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습니다. 해적과 모진 풍랑을 만나고, 그를 질투해 나무를 없애려는 자와 다투다 나무의 가지가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멈춰서 오랜 시간이 경과되고 결국엔 자신이 마실 물조차 부족한 상황에서도 클리외는 자신에게 할당된 물을 커피나무에 주며 정성을 다하고 결국엔 마르티니크 섬에 커피나무를 옮겨 심는데 성공합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노예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며 돌본 결과 나무의 수는 점차 늘어났고 1726년에는 첫 수확을 거둔다. 그곳에서 잘 자란 커피나무는 훗날 프랑스령 기아나로 옮겨져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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